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문단 편집) === 정유재란과 그 후 === 그 후로는 [[임진왜란|정유재란]]에 참가하였으며, 일부 기록에서는 정유재란의 총대장으로 기록되어있다. 전후 30만 석의 치쿠젠에서 15만 석의 에치젠으로 전봉되었다. 히데아키가 물러난 치쿠젠은 도요토미 정권의 부교 관리지가 되었다. 이 전봉의 구체적인 이유는 불명확하다. 2차 사료, 군키모노 등에서는 [[울산성 전투]] 때 총대장의 신분임에도 위험하게 전선에 직접 나아가 싸웠기 때문에 "대장의 본분을 잊었다"며 히데요시에게 질책당하고 전봉된 것으로 묘사되지만, 이러한 일로서 전봉되는 것은 다소 상식적이지 않으며, 히데아키의 울산 참전 여부 자체가 불분명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사실이 아닐 것이라는 의견이 상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데아키의 이봉은 정유재란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파악된다. 이에 대한 시각들을 살펴보면, 당시 히데아키와 무네나가의 대립은 완화되지 않고, 양자의 대립이 심화되자, 히데요시가 자신의 의중에 따르지 않는 히데아키를 전쟁의 총지휘관역에서 배제하는 한편 전쟁에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영지인 치쿠젠에서도 배제한 것이라는 시각, 히데요시 사후 조선에서의 철수가 완료된 이후 치쿠젠 영지로 복귀하였다는 점을 고려하여, 일본군의 철수 거점인 치쿠젠을 도요토미 정권 측에서 직접 관리하며 제장들의 귀환을 감독하기 위해 히데아키를 에치젠으로 이동시켰다는 시각, 일본군 철수 목적이 아닌 장기화된 전쟁의 병참 기지로서의 안정화를 위하여 그에 반대하던 히데아키를 배제하고 치쿠젠을 정권에서 직접 관리하려 시도한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어느 것이던 정유재란과 연관이 있으며, 히데요시가 히데아키를 견제하려 한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 이봉으로 인하여 히데아키의 원 가신단은 해체, 일부는 히데아키를 따라 에치젠으로 들어갔고, 일부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주가인 모리 가문의 휘하에 들어갔다. 또 일부는 이시다 미츠나리 등 도요토미 정권의 인물들의 치하에 들어갔다. 지속적으로 히데아키와 대립하여 결국 이봉의 원인을 제공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는 가로 야마구치 무네나가의 경우 완전히 독립 다이묘로서 카가 다이쇼지 성주가 되었다. 히데요시가 죽고 전쟁이 완전 종결된 뒤 히데아키는 본래 영지였던 치쿠젠의 다이묘로 복귀, 농민의 안정화를 꾀하는 한편 야마구치 무네나가가 탈취하였던 하카타 상인들의 특권을 다시 그들에게 부여하고 간섭 정지를 선포하여 상업 증진을 도모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